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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효기간이 지난 사랑과 외로움의 재발견

      한 금발머리 여성의 움직임을 따라 카메라가 이동한다. 긴장감 흐르는 음악과 함께 흔들리고 끊어지는 화면 속에서 도착한 어떤 방. 그 순간 커튼이 처지며 총성과 함께 제목 4글자가 화면 전체를 뒤덮는다. <중경삼림>은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왕가위 감독의 1994년 작품이다. 9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임청하, 금성무, 양조위, 왕페이 네 남녀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022년에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될 정도로 여전히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지금 봐도 너무 공감되는 명대사 덕도 큰 것 같다. “만약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 "그녀가 떠난 후 이 방의 모든 것들이 슬퍼한다" 한 번이라도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문장들이다. 영화에는 총 4명의 남녀가 등장한다. 여자친구의 이별 통보가 거짓말이길 바라는 경찰 허지무. 마약 밀매를하던 도중 배신을 당해 위험에 빠진 금발머리. 어느날 갑자기 날라온 연인과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찰 663. 그런 663을 짝사랑하는 단골 샐러드 가게 점원 페이. 네 사람의 엇갈린 로맨스를 중심으로 영화는 전개된다. 1부에서 금성무와 임청하, 2부에서 양조위와 왕페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분량이나 이야기 임팩트 면에서 2부가 훨씬 비중 있게 다뤄진다. 특히 양조위가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물건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설정은 다른 영화들에서도 클리셰처럼 자주 등장하곤 한다.


      30년이 흘러도 스타일리시한 영상미, 영화 리뷰

      왕가위 작품 하면 떠오르는 건 단연 감각적인 연출과 스타일리시한 영상미다. <중경삼림> 역시 30년이 흐른 지금 보아도 감탄사가 나올 정도다. 배경만 90년대일 뿐. 스타카토처럼 끊어지며 연결되는 화면은 왕가위 감독만의 전매특허다. 하지만 나에게 이 영화는 특히 캐릭터의 사랑스러움이 가장 컸던 영화다. 헤어진 여자친구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파인애플 깡통을 사모으는 허지무. 유통기한인 5월 1일, 결국 혼자 남은 그는 하룻밤에 그 모든 깡통을 먹어버린다. 그것도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맛있게. 그냥도 먹고, 소스를 뿌려서도 먹고. 갑자기 펼쳐지는 먹방쇼에 홀린 듯 나도 그만 파인애플 캔을 사서 먹었을 정도니까. 그리고 둔한 사람 테스트에 나가면 단연 1등 할 경찰 663번. 집안 물건들이 계속 바뀌는데 이상하다는 생각 없이 계속 말을 건넨다. 페이는 또 어떠한가. 사랑에 빠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극강의 귀여움을 선사한다. 663의 헤어진 연인이 가게에 맡기고 간 열쇠로 그의 집을 드나드는 그녀. 매일 그의 집을 이리저리 꾸미고 바꾸는 게 낙이다. 지나가다 밥 먹는 그를 보면 무턱대고 자리에 앉기 일쑤. 가게 안에서 'California Dreamin'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그녀. 귀여움을 사람으로 만든다면 딱 '페이'라고 생각한다. 이토록 멋진 영상과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로 인해 지금 봐도 힙한 영화 <중경삼림>. 영화의 또 다른 백미는 OST에 있다. 한 번 들으면 평생 귓가에서 맴돌며 흥얼거리게 되는 중독성 강한 음악 말이다. 실제로 영화에 주요 장면마다 등장한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은 영화 개봉 후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이미 은퇴한 마마스 앤 파파스가 1996년에 내한 공연을 가질 정도였다면 인기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노래와 함께 영화를 대표하는 또 한곡의 노래. 바로 극 중 페이가 부른 '몽중인'이다. 원곡은 크랜베리스의 'dreams'지만 페이 특유의 청량한 음색이 입혀진 '몽중인'이 나는 훨씬 좋았다. 영화의 엔딩에서 흘러나올 땐 온몸이 움찔거릴 정도.

      놀라운 영화 제작 비하인드와 후속작 소식

      <중경삼림>은 왕가위 감독 영화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이고 경쾌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 필모그래피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아비정전><동사서독><타락천사><2046><일대종사> 등. 다른 작품들은 영상미는 뛰어나지만 담고 있는 메시지가 은유적이라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 그와 달리 중경삼림의 이야기는 보는 순간 바로 이해될 만큼 쉽고 단순하다. 감성적이고 따뜻하면서 시각적으로도 탁월한. <중경삼림>이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이 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놀라운 제작 비하인드가 숨어 있다. 우선 영화의 촬영기간이 고작 23일이다. 편집에도 2달 정도만 소요되었다고 한다. 제작 기간만 보면 왕가위가 소품처럼 만든 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사실 이 영화는 왕가위가 즉흥적으로 만든 영화였다. 당시 그는 <동사서독>이라는 영화를 촬영 중이었다. 그런데 촬영 기간이 자꾸 늘어지자 지친 그는 오랜만에 기분도 풀 겸 가벼운 영화를 만들게 된다. 그게 바로 <중경삼림>이었던 것이다. 결국 계획 없이 우연히 제작하게 된 영화가 왕가위의 세 번째 영화이자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다. 이쯤에서 역시 천재는 다른 것인가 생각해 본다. 2013년 이후로 신작을 발표하지 않고 있는 왕가위 감독. 근황이 궁금했는데 <중경삼림> 후속작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왕가위 감독이 직접 집필,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대략의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2036년 충칭, 소년 샤오첸과 메이는 유전자에 의해 짝이 정해지는 것을 거부한 채 자신만의 운명을 찾기로 결심한다." 촬영감독은 당연히 크리스토퍼 도일이겠지. 왕가위 감독과 9편이나 함께할 정도로 찰떡 호흡을 자랑하니 말이다. 물론 기사가 나온 시점이 3년 전이긴 하지만 36년을 배경으로 한다고 하니 그전까지는 나오리란 희망을 가져본다. 과연 이번 주인공은 누구일지. 또 어떤 아름다운 화면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너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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